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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와 기독교신앙 (박득훈 목사)

한미 FTA!!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판단하기 많이 어려우시죠?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박득훈 목사님의 명쾌한 강의! 판단하시는데 많은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한미FTA와 기독교신앙

박득훈 목사(새맘교회)


한 미FTA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과 입장을 확립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한미FTA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과 기독교신앙의 사회윤리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역동적으로 결합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한미FTA의 본질과 성격 그리고 그것이 한국사회와 경제에 미칠 영향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함께 하신 두 분께서 이 부분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여 저는 가급적으로 기독교신앙의 사회윤리적 관점에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는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 한미FTA의 본질과 영향에 관해 서로 상충되는 분석과 주장에 대한 기독교적 시각과 입장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기독교적 관점에서 한미FTA가 한국사회에 미칠 영향에 대한 사실파악을 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그렇게 파악된 사실에 관한 기독교사회윤리적 해석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한미FTA에 대한 신앙적 입장을 정리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사회적 실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저는 오늘의 논의를 통해 기독교인은 마땅히 현재 형태의 한미FTA를 적극적으로 저지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자 합니다. 


Ⅰ. 한미FTA를 둘러싼 사회과학적 논쟁에 대한 기독인의 바른 관점

한 미FTA에 대한 상충되는 주장들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바른 판단을 하려면 사회과학적 분석의 이면에는 항상 가치판단에 기초한 이념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여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회과학적 분석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지성 자체가 항상 이념과 사실파악을 연계시킬 수밖에 없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똑 같은 경제현실을 놓고 분석하고 평가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구체적 사실을 잘못 파악해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갖고 있는 가치판단과 이념에 따라 사실을 달리 해석하고 평가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래서 똑 같은 한미FTA협정문을 놓고 서로 상충되는 분석과 평가가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현실에서 기독인은 과연 어떤 기준으로 상충되는 주장을 평가할 것인가 입니다.

1. 판단 및 선택 기준

두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해방신학자 클로도비스 보프가 잘 제시한 것처럼 사회분석도구에 내재되어 있는 이념적 관점1)과 과학적 역량입니다. 먼저 사회적 약자의 경제적 권리를 중요시 여기는 이념적 관점에서 한미FTA를 분석하는 것과 경제의 총체적 성장을 중요시 여기는 이념적 관점에서 한미FTA를 분석하는 것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리스도인이 경제현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상대적으로 선호해야할 이념적 관점은 이 두 가지 중 전자 즉 사회적 약자의 경제적 권리를 존중하는 관점이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불완전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후자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둘 중에 하나를 반드시 선택하도록 요구받는 긴급한 상황에선 주저 없이 전자를 선택해야 합니다.

왜 냐하면 성경 전체가 이를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애굽경제를 평가할 때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노예 백성인 히브리인들의 입장에서 바라보셨습니다. 노예제도가 애굽경제의 전체적 효율성을 증가시켰다고 해도 그것이 노예들의 착취와 억압에 근거한 것이라면 정의롭지 못한 것이고 극복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여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을 바로의 정치경제 체제에서 해방시키시고 가나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정치경제제도를 실현케 하셨습니다. 그 제도는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를 철저히 보장하고 확보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희년법은 사실 50년 동안 열심히 노동하고 절약해서 땅의 소유지분을 확장한 사람의 입장에서 얼마나 부당한 법입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땅을 잃은 가난한 사람과 그 자녀들의 입장에서 제도를 확립하셨습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경제정의의 핵심사상입니다. 선지자들이 이를 강력히 옹호했고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심으로 그 정신을 강화하고 완성시키셨습니다.    

또 한 각 사회분석적 도구가 보여주는 과학적 역량 역시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참을 옹호하고 거짓을 배격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특정한 이념적 관점을 갖고 있다고 해서 경제현실분석의 과학적 정확도를 보장해주지는 못합니다. 종합적이고 세밀한 이론의 틀을 만들고 그에 기초해 실증적 분석을 하고 합리적으로 논리를 전개해 가는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탁월한 과학적 역량을 보여주는 경제분석을 상대적으로 선호해야 합니다.

2. 신뢰할 수 없는 분석과 주장들

이 런 기준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이 신뢰할 수 없는 분석과 주장들이 분명해집니다. 첫째, 자신의 분석은 가치중립적이고 어떤 이념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오로지 사실에 기초한 것이라고 주장하면 일단 신뢰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한미FTA를 옹호하는 경제 통상 관료들의 분석과 판단을 전반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미국에서 발전된, 가치중립을 표방하는 주류경제학의 신봉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지 난 11월 2일 미국 하버드 대학의 그레고리 맨큐 경제학 강의 시간에 70여 명의 학생이 일제히 일어나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강의실에서 빠져나온 학생들은 ‘맨큐 교수에게 드리는 공개서한’을 낭독하고 토론을 벌였습니다. 공개서한의 핵심은 ‘당신의 수업은 (시장근본주의 경제학에) 지나치게 편향되어 있다. 당신이 우리에게 주입하는 경제학은, 미국 사회의 빈부격차를 영구화하고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유발한 그 이데올로기가 아닌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하버드 대학 신문인 「크림슨」은 사설에서 ‘맨큐 수업은 사화과학인 경제학의 학문적 기초를 제공하는 과정으로 편향되지 않았다’며 맨큐를 변호하고 나섰습니다,

그 러나 이야말로 무서운 편향적 관점이요 독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오랫동안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으로 미국의 경제대통령 역할을 감당했던 앨런 그린스펀에 의해서도 증명된 바입니다. 그는 2008년 10월 23일 미국 하원 정부개혁 및 감독 위원회의 출석해 증언했습니다. 그는 헨리 왝스먼의 질문에 답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 두가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죠. 아니 그래야만 합니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정확하냐, 아니냐는 거지요. 내가 말하려는 건, 그래요, 결함을 발견했습니다. … 말하자면 세상의 작동방식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기능구조라고 여겼던 모델에서 결함을 발견했다는 겁니다.

이 에 왝스먼은 더 밀어붙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의 세계관이나 이데올로기가 잘못되었고, 그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걸 발견했다는 거지요?’ 그린스펀은 순순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내가 충격을 받은 겁니다. 왜냐하면 40년이 넘도록 그 모델이 아주 잘 작동하고 있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었으니까요.’2) 상황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떤 이데올로기로부터도 자유롭다고 확신하는 주류경제학자들, 그리고 그들에게서 배운 경제통상관료들은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둘 째, 경제적 사실을 너무 과장하거나 감추는 분석도 경계해야 합니다. 예컨대 한미FTA가 한국경제에 가져다 줄 경제효과에 대한 과장을 조심해야 합니다. 정부는 한미FTA가 가져다  주는 GDP 경제성장효과가 최대 5.7%이고, 일자리 효과가 약 35만개이며, 무역 수지가 70억 달러 정도 개선될 거라는 전망을 내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해영 교수가 동일한 모형을 갖고 국제표준모델에 근거해서 추계한 바로는 GDP 경제효과가 0.08~0.13%에 지나지 않으며 이 수치를 다시 10으로 나누면 매년 효과가 0.008%에서 0.013%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국회끝장토론에서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경제적 전망이 틀릴 수 있음을 시인했습니다. 그럼에도 전망을 하는 이유는 방향성을 알기 위해서라며 0.08%라도 긍정적 효과라는 구차한 답변을 했습니다.

또 한 정부는 한미FTA 특히 투자자-국가소송제(ISD)를 도입한다 해도 한국의 공공정책 특히 교육, 보건, 의료, 환경관련 정책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히 경제적 사실에 대한 과소평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한미FTA에 의하면 국가의 공공정책이나 규제에 의해 미국 투자자가 부당하게 손해를 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한미FTA 부속서 11-나의 3-나 항에 의하면 비록 드문 경우라는 사족이 붙어 있지만 정부의 조치가 그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면 ‘그 목적 또는 효과에 비추어 극히 심하거나 불균형적이 아니어야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아주 애매한 문구입니다. 더구나 이에 대한 판단은 국제중재부에서 합니다.

또 한 한미FTA에 구속되지 않는 미래유보항목 44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안전하지 않습니다. 한미FTA부속서 II, 면에 위하면 공공질서 유지를 위하여 필요한 규제라도 ‘투자자의 진입과 인수에 대해서만, 그 투자가 사회의 근본적 이익에 대하여 진정하고 충분히 심각한 위협을 가져오는 경우에만, 투자에 대한 위장된 제한이지 않도록,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과 비례해서’ 도입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한국이 국제중재부가 만족하도록 입증해야 합니다.

그 런데 문제는 찬성과 반대측이 서로를 향해 사실을 과장 왜곡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1500 면이나 되는 한미FTA협정문을 다 읽어보지 못한 비전문가로서 이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입장에 서 있지 못합니다. 저는 다만 개인적으로 찬성측의 과장은 장밋빛 환상에 가깝고 반대측의 우려는 상당히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를 갖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가 크겠지만 양측이 다 일정 정도 과장을 하고 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설 사 그렇다 해도 그리스도인에겐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둘 중 하나를 선호할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이념적 기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회적 약자가 겪을지도 모르는 고통을 염두에 둔 과장을 선호해야 합니다. 어차피 정치경제적 예측은 매우 어렵고 불확실한 작업입니다. 어느 쪽이 옳다고 판명 날지 그 누구도 100%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데 주력해야할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사회적 약자가 겪을 고통을 염두에 둔 예측이 비록 일정정도 과장을 내포하고 있다 해도 선호해야 합니다.

3. 주목해야 할 분석과 주장들

1) 방향성의 문제

저 는 한미FTA에 관련해서 그리스도인에게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세부사항보다는 방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부사항과 관련해선 양측 주장의 옳고 그름이 어느 정도 엇갈릴 수 있습니다. 즉 어느 사항에선 찬성측이 옳을 수 있고 어느 상황에선 반대측이 옳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미FTA가 추구하고자 하는 큰 틀의 방향성입니다. 그 방향성이 앞으로 한국사회와 경제의 성격을 규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미FTA의 특성상 그렇게 규정된 한국경제의 틀을 다시 바꾼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 러므로 저는 그리스도인이 진지하게 주목해야할 분석과 주장은 한미FTA가 추구하는 방향에 대한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정확한 분석과 주장은 한미FTA는 본질적인 면에서 미국시장과 한국시장을 통합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미국형 자본주의 즉 신자유주의 정치경제체제를 한국에 이식하는 것에 다름아니다는 분석과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한미FTA를 추진하면서 고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을 신자유주의 좌파라고 당당하게 말한 데서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여기엔 임기 중 밝힌 것처럼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판단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노 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냈던 이정우 교수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한겨레』 신문의 한 기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시에는 장밋빛 환상이 지배했고 미국경제 체질의 병폐가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도(정태인 당시 국민경제비서관도 포함해서)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문제점을 추상적으로만 알고 있어 대통령을 설득할 만한 논리로 무장되지 못했다.’3) 이는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FTA를 추진하면서 미국경제체제를 이상적인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로 받아들여 한국경제에도 그대로 수입하려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한미FTA 협상을 시작할 무렵, 당시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2006년 2월 국정브리핑에서 한미FTA가 추구하는 방향을 분명히 했습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낡은 일본형 경제 시스템을 버리고 미국형으로 개조하는 게 우리의 살 길입니다.

한미FTA는 단순한 관세협상이 아니라 미국의 법과 제도를 대폭 수용하여 한국경제체제를 미국식으로 전환시켜나가는데 더 본질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2) 한국헌법이 지향하는 경제체제

그 러므로 한국경제는 지금 매우 중요한 기로 점에 서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헌법 119조 2항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헌법조항은 한국경제체제에 대한 큰 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은 국가에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입니다. 그 목적은 세 가지입니다.

첫 째,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 그리고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달성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지국가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둘째,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 남용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엔 분명히 시장만능주의와 자본권력의 절대화를 배격하는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셋째,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정치영역에서만이 아니라 경제영역에서도 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본과 노동 사이에 힘의 불균형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대한민국의 헌법이 지향하는 이러한 정치경제체제를 무엇이라고 부를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적어도 오늘 미국정치경제제체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가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 런데 지금 한국정부는 한미FTA를 밀어 붙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한미FTA가 헌법정신과 어긋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앞뒤가 도무지 맞지 않는 궁색한 위장전략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한미FTA옹호자들은 한결같이 선진적인 미국경제체제를 후진적인 한국경제에 이식하는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경제체제와 한국헌법이 지향하는 경제체제와는 극명하게 다르다는데 있습니다.

그 러므로 그리스도인을 포함해서 우리 국민들은 한국경제의 미래에 대해 실로 심각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헌법이 지향하는 경제체제를 향해 갈 것인지 아니면 미국식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향해 갈 것인지 말입니다. 이것은 큰 방향의 문제입니다. 한미FTA가 발효되면 이 방향이 결정되는 것이고 돌이키기가 너무나 어려운 것이 될 것입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여러 논쟁과 다툼이 있겠지만 결국엔 대부분의 경우 이 방향에 따라 그 답이 결정될 것입니다. 지금 아무리 한국의 공공정책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해도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3) 미국경제체제의 주요 특징

그 렇다면 우리는 바른 선택과 결정을 위해 도대체 미국식 자본주의 즉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미국경제체제의 주요특징을 살필 때 사회적 약자의 관점에서 평가해야 합니다.

첫 째, 경제적 불평등이 매우 심각합니다. 지난 11월 8일 CNN머니는 세계은행의 통계자료를 인용, 미국의 소득불평등이 심각하다고 보도했습니다. 세계은행의 이코노미스트인 브란코 밀라노빅이 2008년을 기준으로 해 전 세계 90개국의 지니계수를 조사한 결과 미국은 43.2로 소득불평등 수준이 가장 높은 3분의 1에 포함됐습니다. 선진국 중에선 불평등이 가장 심각합니다. 한국은 소득불평등 수준이 낮은 50%에 포함되어 미국보다 오히려 양호함이 판명되었습니다.4) OECD 국가 중엔 미국이 4위로 높고 한국은 14위입니다.

둘 째, 선진국가 중 복지수준이 매우 낮습니다. 미국은 선진국 중 유일하게 전 국민 건강보험제도 조차 없는 나라입니다. 정부는 노인건강보험(Medicare)을 운영할 뿐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미국의 사회적 약자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지는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식코』를 통해 전 세계에 잘 알려졌습니다. 이것은 결코 미국의 경제력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미국정치경제체제에 내재되어 있는 경쟁만능주의와 개인주의적 이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현재 한국은 미국보다 낫습니다. 하지만 한미FTA를 통해 미국경제권에 한국경제가 확실히 포섭된다면 그나마 싹이 트고 있던 한국의 복지정책은 치명적인 위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경제총량이 확대된다 해도 그것이 복지로 흘러가기는 한결 더 어려워질 것이 분명합니다.

셋 째, 2008년 미국금융위기 대처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것처럼 미국경제는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하는 체제입니다. 이는 마이클 센델이 지난 10월 12일 세계지식포럼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을 때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면서 내린 평가이기도 합니다. 그는 월가점령시위를 평가하면서 ‘명백히 정의와 공정과 관련된 문제’라고 밝히면서 그 점을 지적했습니다.5) 이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본질입니다. 한국의 경우에도 1997년 외환위기로 말미암아 IMF관리체제를 겪은 이후 이익의 사유화와 손실의 사회화가 깊이 뿌리내려 왔습니다. 그 결과로 부자감세, 소위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미명하에 강요된 해고, 열악한 비정규직의 양산 등이 이루어졌습니다. 용산참사, 쌍용자동차와 한진중공업 해고 사태가 다 그 맥락에서 발생한 불행한 사건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런 특징을 갖고 있는 미국이 한국과 한미FTA에 따라 무역을 한다면 한국경제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생각해 볼 차례입니다.

 

4) 한국경제에 미칠 영향

앞 에서 잠시 살펴본 것처럼 경제적 예측은 매우 어려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측면에서 일정한 경향성들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선 기독교사회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한 의미가 있는 두 가지 결과에만 주목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양극화의 심화이고 둘째 장기적으로 불공정한 무역입니다.

양극화의 심화

신 자유주의의의 이념적 기초를 다진 대가 중 하나인 하이에크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일종의 도박에 비유했습니다. 왜냐하면 경제활동의 결과가 부분적으로는 기술과 노력에 의존하고 부분적으로는 운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제체제에선 빈부의 격차가 늘어나게 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본주의의 약점이 아니라 도리어 강점이라고 강변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양극화 현상 때문에 사람들은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경제활동을 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자본주의 사회는 강한 동력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하이에크말로 정직한 자본주의 경제학자라고 생각합니다.

바 로 그런 맥락에서 저는 한미FTA는 양국가의 서민대중을 볼모로 삼고 양국가의 가진 자들이 벌리는 도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도박에 성공하면 양국의 가진 자들은 상당한 이익을 챙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국의 가난한 자들은 별 혜택을 받지 못하거나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가진 자들의 부가 충분히 축적되면 그 부의 상당 부분이 흘러넘쳐 양국의 사회적 약자들에게도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갈 것이라는 주장 즉 누수이론(trickle-down theory)은 실증적으로 증명된 바 없는 일종의 이념에 불과합니다. 이 도박에 실패하면 97년 한국의 IMF경제위기와 2007년 미국금융위기에서 똑똑히 본 것처럼 가진 자들은 그 와중에도 상당한 혹은 그럭저럭 이익을 챙길 것이고 손실은 사회화되어 서민대중들만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하 여 이해영 교수가 한미FTA의 투자자-국가소송제에 대한 평가는 한미FTA전체에도 적용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한미FTA는 ‘한국의 국익 대 미국의 국익이 아니라, 한국·미국 자본 대 한국·미국 피플이 대립하는’ 협정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6) 그 결과가 양극화의 심화일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장기적으로 불공정한 무역

자 유무역이 모두에게 유익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최초의 국제자유무역이론은 영국의 정치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르도에 의해 ‘비교우위론’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되었습니다. 각국이 상대적으로 생산성이 높은 품목만 집중적으로 생산하여 서로 무역을 하면 전체적으로 생산성이 높아짐으로 모두가 경제적 이득을 얻게 된다는 이론입니다.

그 러나 이 이론은 경제력이 비등한 국가 간의 무역에나 어느 정도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경제발전의 수준의 격차가 큰 나라끼리 FTA를 맺으면 두 나라의 경제력의 순위가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장기적으로는 선진국은 이익을 보는 반면 후진국은 손해를 볼 가능성이 큽니다. 경쟁력이 없는 후진국의 기존 산업은 도태되는 반면, 미래 성장동력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닌 새로운 산업은 일어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하준 교수가 실증적 연구를 토대로 줄기차게 주장해온 바이기도 합니다. 최근에도 경향신문에 글을 기고하면서 ‘미국이나 유럽연합 등 선진국들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으면, 이미 세계 수준으로 성장한 전자, 자동차 등의 산업에서는 어느 정도 이득을 보겠지만, 우리가 현재 뒤쳐져 있는 (대부분의) 산업들에서 추격을 하기가 매우 힘들어진다’고 전망했습니다.7) 


Ⅱ. 한미FTA에 대한 신학적 입장

이제 앞선 논의를 바탕으로 해 한미FTA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우선 적절하지 않은 입장을 살펴보겠습니다.

1. 적절하지 않은 입장

적절하지 않은 입장으로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1) 이원론적 무관심

적 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한미FTA에 무관심한 것은 기독교에 대한 이원론적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기독교신앙은 영혼이나 정신과 관련된 문제만을 다루기 때문에 경제적 문제에 대하여 깊이 관여할 필요가 없다는 관점입니다. 이는 한 마디로 성경적 사상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형이상학적 혹은 가치론적 이원론을 주장하는 헬라 철학과 문화를 만나면서 왜곡된 결과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지도층이 사회지배계층이 되면서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편리하게 수용하고 강화시킨 관점입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으면 진정한 신앙은 영혼과 몸을 함께 아우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 레미야는 성전건물에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구원받았노라 주장하면서 사회적 약자를 경제적으로 착취하며 억압하는 일을 일삼는 자들의 신앙을 거짓이라고 단호히 비판했습니다. 그런 이원론적 거짓신앙에 매몰되어 있는 자들을 하나님의 집을 도둑의 소굴로 전락시키는 자들이라고 맹렬하게 꾸짖었습니다(렘 7:1-11). 예수님은 정확히 이러한 예언자적 전통을 전수하고 완성시키셨습니다. 하여 같은 맥락에서 성전을 청결케 하며 성전지도자들과 그 추종자들에게 분노를 표출하십니다(막 11:15-18; 요 2:13-22).

이 러한 실천은 예레미야나 예수님이 성전체제와 그 지배층을 향해 하신 것이라고 해서 교회공동체 내부에만 국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예레미야나 예수님에게 사회적 현실이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나 예수님의 실천을 교회와 사회가 일정 정도 분리되어 있는 우리 시대에 제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삶의 사회적 현장인 일반사회로 뛰어들어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이 좋다고 하면서 좁은 의미에서의 영적 활동 즉 예배, 기도, 성경공부, 전도 등에만 전념하고, 한미FTA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져다 줄 엄청난 고통을 외면한다면 주님으로부터 엄청난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2) 성공주의에 근거한 시혜적 삶    

적 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한미FTA가 발효 되도 별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데는 성공주의에 근거한 시혜적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에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이 노력하고 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성공해 부자가 되어 사회적 약자들에게 시혜를 베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에 그런 흐름이 생기면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간다고 믿습니다. 요즘의 세련된 기복신앙은 다 이런 기조를 갖고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이기적 욕망을 부추기기 보다는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성공하라고 권면합니다.

그 러나 여기엔 아주 위험한 오류가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이 성공하여 부자가 되도록 허용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자체가 얼마나 불공정한가를 간과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김규항이 『예수전』에서 잘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나라의 나눔을 “‘불쌍한 사람’과 그 불쌍한 사람을 돕는 ‘훌륭한 사람’으로 역할을 나누어서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쇼” 정도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8)

둘 째,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성공해야만 한다는 주장은 하나님나라의 사랑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였다면 예수님은 애초에 말구유에 탄생하면 안 되셨습니다. 목수의 아들로 자라 머리 둘 곳도 없이 가난하게 공생애를 사시다 십자가에서 삶을 마감하신 것은 실패 중 실패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물질적 나눔을 포함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 본질은 나누는 물질의 양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에 담긴 사랑의 깊이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적 의미에서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아름답고 위대한 하나님나라의 깊은 사랑을 이웃에게 베풀 수 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이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했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세 번째 오류는 성경적 전통은 신앙인들에게 시혜적 삶 뿐 아니라 불의한 사회구조와 제도를 변혁시켜나가는 실천에 참여할 것을 요청한다는 점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예 수님께서 단지 사랑과 긍휼의 차원에서만 병든 자를 고치시거나, 길을 가다 밀 이삭을 잘라내 손으로 비벼서 아침 대용으로 먹은 가련한 제자들을 옹호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그렇게 목숨의 위협까지 받을 정도로(막 3:6) 격렬한 반대와 저항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눅 13:14).

유대교 지도층에게 ‘유대교는 일개 종교가 아니라 유일한 가치관이자 윤리이자 법이자 정치이념인 “전적인 정신체계”’ 이었습니다.9) 그리고 안식일에 노동을 금지하는 법은 바로 그러한 유대교 율법체제의 근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거나,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는 추수행위를 옹호하는 것은, 단순한 사랑과 긍휼의 행위가 아닙니다. 김규항이 정확히 짚은 것처럼 예수님은 병자를 단지 육신적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잃어버린 인권을 회복시키고 죽음 같은 삶을 회복시킨 것입니다.10) 그것은 유대교 체제 자체를 흔들어 전복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절정이 앞서 언급한 성정청결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적당한 수준에서 유대교체제의 개선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뒤집어 다시 세우려 하신 것입니다.11) 그런 점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나라는 우리 시대의 언어로 번역하자면 ‘새로운 세상’이며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세상을 변혁하는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12)

3)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  

자 신은 어떤 입장을 갖고 있지만 자신과 다른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들은 두 입장 사이의 치열한 토론과 논쟁을 싫어합니다. 양쪽 다 일리가 있다고 여기고 넘어갑니다. 매우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사회적 강자와 다수에게 편리한 입장입니다. 즉 국회의원들 중 한미FTA를 지지하는 이들이 더 많으면 옳고 그름을 떠나 한미FTA가 비준되고 발효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미FTA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말 한마디 해보지 못하고 그 결과를 수용해야하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불공정한 일입니다.

2. 올바른 입장: 강력한 저항

진 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한미FTA에 대하여 강력히 저항해야 합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미FTA가 발효되면 한국의 헌법정신은 무너지고 미국식 자본주의 즉 신자유주의가 한국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한미FTA에 강력히 저항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 이제 왜 그리스도인들이 신자유주의에 대하여 강력히 저항해야 하는지 그 신학적 이유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맘몬숭배: 하나님에 대한 도전

신 학적 관점에서 볼 때, 악은 본래  ‘더 작은 선'(a lesser good)인데 하나님을 대체하는 순간 악이 됩니다. 악이란 ‘더 작은 선’에 대한 어이없는 즉 무질서한, 멋대로의, 무절제한, 과도한 사랑으로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통해 ‘더 작은 선’을 사랑할 때만이 그 사랑은 적절한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더 작은 선’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그것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과 관련해서 사랑하게 될 때, 비로소 모든 것을 향한 정당한 사랑의 근거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악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의지입니다.

신 자유주의 안에 내재되어 있는 악의 본질은 맘몬숭배사상입니다. 신자유주의가 생산해내는 것, 즉 총량으로 측정되는 경제적 풍요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그건 어떤 점에서 앞서 언급한 ‘더 작은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맘몬숭배사상이란 총체적으로 측정된 경제적 풍요를 ‘더 작은 선’이 아닌 ‘최고선’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그것은 악이 되고 맙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공산당 선언』에서 자본주의가 이룩해낸 생산력의 증강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부 르주아는 100년도 채 안 되는 그들의 지배기간에 지나간 모든 세대가 창조한 것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 많고 더 거대한 생산력을 창조했다. 자연력의 정복, 기계, 공업과 농업에 화학의 응용, 기선 항해, 철도, 전신, 경작을 위한 전 대륙의 개간, 하천의 운하화, 마치 땅 밑에서 솟아난 듯한 모든 인구―이전의 어느 세기가 이와 같은 생산력이 사회적 노동의 무릎 위에서 잠들어 있음을 예감이라도 했겠는가?13)

그러나 『공산당 선언』은 그 이면의 병폐 즉 사유재산제도가 갖고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사유재산을 폐지하려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이들에게 『공산당 선언』은 이렇게 답합니다.

그 러나 당신들의 현존하는 사회에서 사유재산은 이미 인구의 10분의 9에게는 폐지되어 있다. 소수에게 사유재산이 존재하는 것은 단지 이 10분의 9의 손에 사유재산이 존재하기 않기 때문일 따름이다. 따라서 당신들은 사회의 거대한 다수에게 어떤 재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어떤 재산 형태를 폐지하려 한다고 우리를 비난하는 셈이다.14)

물 론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역사적으로 노동자 계급과 일정 정도 타협하여 다양한 복지정책을 수용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일정한 수준의 중산층이 유지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복지정책이 벽에 부딪히는 상황에서 자본축적의 위기가 다시 도래하면 노골적인 자본주의가 다시 부활합니다. 그것이 바로 1970년도 중반에 시작된 신자유주의 지구화입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사회적 양극화는 심화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결 국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총체적 부의 극대화, 그리고 소수에게 집중된 부의 축적을 절대화합니다. 그 외의 가치와 이상은 억압합니다. 그 순간 자본주의는 맘몬숭배의 온상이 되는 것입니다. 더 작은 선을 지고선의 자리로 올려놓기 때문입니다. 허경회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맘몬숭배를 실로 예리하고 적확하게 표현했습니다.

신 은 죽었다. 그러나 돈의 신, 맘몬은 예외이다. 우리들 현대인에게 그는 유일하게 현재(顯在)하는 신이다. 우리들은 ‘이성 잃은 경제 이성’으로 유일하게 현재하는 신, 맘몬의 영광을 이 땅에 재현하는 거룩한 맘몬의 성도(聖徒)들이다. 우리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우리의 생명 그 자체인 노동을 스스로 쥐어짜 내며 부를 간구하고 있고, 맘몬은 반색하며 우리에게 ‘마조히스트(masochist)의 자학적 풍요’를 하사하고 있다. 또한 우리들은 가난으로 고통받는 다른 우리들에게 등을 돌리며 나의 부를 간구하고 있고, 맘몬은 우리에게 기꺼이 ‘샤일록(Shylock)의 냉혹한 풍요’를 하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맘몬에게 우리의 건강과 우리 후손의 멸종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생명의 종식을 번제물로 바치며 부를 간구하고 있고, 맘몬은 우리에게 흔쾌히 ‘학살자(slaughterer)의 잔혹한 풍요’를 하사하고 있다.15)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테리 이글턴은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나쁜 방향으로 무신론적’일 수밖에 없다고 평가합니다.16) 물론 적지 않은 이들이 자본주의를 성경과 신학의 용어로 옹호해 왔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물질적 행태와 거기에 내재된 가치관과 신조들은 실질적으로 신을 부정합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신학적 사고가 불가능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성 취와 충족이 패키지로 거래되고 욕망이 관리되며, 정치마저 경영화되고 소비자중심경제가 지배하는 깊이 없는 사회에서는 신학적인 문제가 적절하게 제기될 가능성조차 거의 없다. 일정 수준 이상으로 심오한 정치적, 도덕적 토론조차 배제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기껏해야 이데올로기적 정당화에, 영적인 향수 달래기에, 아니면 무가치한 세계로부터 개인적으로 탈출하는 데에나 이용되지 않겠는가.17)  

이렇게 본질적으로 맘몬숭배의 기초위에 세워진 자본주의 즉 신자유주의 사회는 인간과 사회를 파괴하는 두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나는 경쟁절대주의요 다른 하나는 양극화현상입니다.

2) 경쟁절대주의와 사회적 양극화: 이웃에 대한 억압

경쟁절대주의와 사회적 양극화는 이웃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진정한 이웃사랑에 대한 부정입니다.

경쟁절대주의

맘 몬숭배는 자연스럽게 경쟁절대주의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각자 자신의 부의 축적을 절대적 목표로 삼는 한 타자와의 절대적 경쟁은 항상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서로의 잠재력을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한 제한된 경쟁, 건전한 경쟁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맞는 일이고 바람직한 것입니다. 허나 그것이 경쟁절대주의라는 하나의 이념으로 자리 잡게 되면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이는 인간본성의 다른 측면 즉 관계적 존재,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성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사회철학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그러한 인간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가정, 시민사회내의 다양한 집단 즉 소위 ‘부분적 공동체’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냉혹한 경쟁은 시장에서만 벌어질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러나 이는 시장의 경쟁논리가 현대사회 구석구석에 얼마나 넓게 그리고 깊숙이 파고들고 있는가를 애써 외면하는 구차한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우쯔바르트가 잘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 지구화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경쟁논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 널리 그리고 아주 깊이 침투하고 있습니다. 학교, 스포츠기관, 심지어는 병원까지 시장의 경쟁논리를 수용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지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경쟁원리는 가히 전체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기업은 치열한 경쟁에 살아남기 위해 정보공학을 최대한 활용하여 각종 미디어와 통신망에 연결된 인간의 마음 깊숙이 침투해 들어가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거의 무방비상태로 다양한 상품과 관련된 정보홍수에 노출되어 진정한 인간성을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행복한 삶에 꼭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새로운 희소성이 인위적으로 창출됩니다.18)  

문 제는 경쟁논리에 철저히 맹종하는 시장은 그 희소성이 충족되도록 세계자원을 동원하는 반면 세계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과 관련된 긴급한 필요를 채우는 일, 즉 식량과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데는 속수무책이라는 점입니다. 이 문제는 정부나 구호단체들에게 넘겨집니다. 정부에서 도움을 받는 경우 그나마 다행이지만 구호단체를 통해 도움을 받을 경우 수혜자는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기 일쑤입니다.

② 사회적 양극화

각자가 자신의 부의 축적을 최대화하기 위해 시장의 절대적 경쟁에 뛰어 들면, 앞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필연적으로 사회적 양극화 현상이 발생합니다. 이는 명민하고 양식있는 주류경제학자들도 인정하는 바입니다.19) 사회적 양극화는 사회의 공동체성을 심각하게 파괴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이들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소위 누수(漏水)이론(trickle-down theory)을 내세워 그러한 비판을 피해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으로 증명된 바가 전혀 없습니다.20) 서구의 사회복지국가 건설도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노동자들 그리고 그와 연대한 이들의 피눈물 나는 투쟁의 산물로서 얻어진 사회적 대타협의 결과일 뿐입니다. 자본주의가 가장 꽃 핀 나라일수록 예외 없이 사회적 양극화는 심화되었고, 미국의 경우 수많은 근로자들의 실질임금이 저하되고 극빈층은 증대되었습니다. 소위 자본주의의 성공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오늘 직접 목도하고 있는 바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그 존엄성과 가치를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신앙이 요청하는 이웃사랑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런데 절대빈곤이 해소되고 기회균등만 보장된다면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에서 발생하는 빈부격차는 도덕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 주장에는 심각한 오류들이 있습니다. 첫째, 신자유주의가 보장해준다는 기회균등은 매우 허구적입니다. 존 롤즈도 인정했듯이 가족제도를 완전히 폐기하지 않는 한 기회균등을 완벽하게 보장하는 것 자체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설사 기회균등의 보장을 위해 힘썼다고 해도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결과로 발생하는 불평등은 그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이미 불공정한 경쟁을 통해 형성된 엄청난 빈부격차를 해소해주지도 않으면서, 시장의 경쟁을 약육강식의 게임이 아니라 효율성을 확보하는 절차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 억압적인 논법입니다.

둘 째 오류는 절대빈곤 뿐만 아니라 지나친 상대빈곤도 인간의 존엄성을 약화시킨다는 점을 간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회 속에서 이웃과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날드 사이더는 이 점을 잘 파악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 혹은 가족이 적어도 품위 있는 삶을 살만한 돈을 벌고 당당한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들(땅, 돈, 교육)을 접할 수 있을 만큼은 균등한 경제적 기회를 갖기 원하신다.21)

이런 조건이 충족되려면 상대빈곤의 문제 역시 하나님이 요청하는 사회정의의 문제로 진지하게 해결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맺음말

그 리스도인에게 한미FTA는 실로 복잡한 사안입니다. 그러나 큰 틀에서 바라보면 예상 밖으로 쉽게 신앙적 입장을 정할 수 있습니다. 우선 상충되는 사회과학적 분석과 주장들 중에서 사회적 약자의 관점을 충분히 반영하고 과학적 역량을 보여주는 것을 선호해야 합니다. 이는 곧 한미FTA를 반대하는 입장의 분석과 주장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분석과 주장 중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현재의 한미FTA가 발효되면 한국정치경제체제는 미국식 자본주의 즉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더욱 가까워진다는 점입니다. 이는 헌법이 지향하는 체제에서 더 멀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욱이 무서운 것은 한번 그렇게 방향을 잡으면 돌이키기가 정말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리스도인은 이러한 한미FTA에 대하여 강력히 저항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미FTA가 가져올 신자유주의의 심화는 맘몬숭배의 강화로 이어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맘몬숭배는 경쟁만능주의와 사회적 양극화를 나을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윤리적 실천인 이웃사랑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됩니다. 이런 신학적 이해를 공유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일어나 한미FTA를 기어이 막아낼 수 있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주석> -----------------------------------------------------------------------------------------------

1) Clodovis Boff, Theology and Praxis; Epistemological Foundations (N. Y., Orbis Books, 1987), pp. 57-60. 보프는 윤리적 관점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필자는 본 글의 일관성을 위해 이념적 관점으로 바꿔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둘 다 일정한 가치판단에 기초한 이론적 성찰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2) 라즈 파텍 지음, 제현주 옮김, 우석훈 해제, 『경제학의 배신』 (북돋음, 2011), 24-27 쪽.

3) 정은주, “불경기·반미 공격받던 참여정부 ‘장밋빛 환상,’ FTA통과 땐 우리 경제 ‘정글자본주의’ 될 것,”
 『한겨레』 인터넷 판, 2011. 11.10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504955.html).

4) 노희영, ‘미 소득 불평등, 선진국 중 최고,’ 『서울경제』 인터넷 판, 2011.11.9.
  (http://economy.hankooki.com/lpage/worldecono/201111/e2011110918041969760.htm)

5) 최원형, ‘마이클 센들, “월가 점거는 명백히 불의에 대한 반응”, 『한겨례』 인터넷 판, 2011.10.12.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00408.html)

6) 천관율, “결국 죽어나는 건 대다수 ‘시민’,” 『시사IN』, 제 218호 (2011.11/12), 27 쪽.

7) 장하준, ‘한·미FTA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경향신문 인터넷 판, 2011. 11.8.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11082146195&code=990000)

8) 김규항, 『예수전』 (돌배게, 2009), 110 쪽.

9) 상게서, 36 쪽.

10) 상게서, 40 쪽.

11) 상게서, 57 쪽.

12) 상게서, 36 쪽.

13)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권화연 옮김, 『공산당 선언』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234 쪽.

14) 앞의 책, 247-248 쪽.

15) 허경회, 『새로운 밀레니엄』, 360-361 쪽.

16) 테리 이글턴 지음, 강주헌 옮김, 『신을 옹호하다』 (모멘토, 2010), 58 쪽.

17) 상게서, 58 쪽. 번역을 필자가 약간 수정했습니다.

18) Bob Goudzwaard, Globalization and the Kingdom of God (Baker Books, 2001) pp. 30-32.

19) Samuelson and Nordhaus, Economics (McGraw-Hill, 1989), pp. 750-751.

20)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부·키, 2010, 184-197 쪽이 이를 잘 증명해줍니다.

21) 로날드 사이더 지음, 한화룡 옮김, 박득훈 해설, 『가난한 시대를 살아가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IVP, 2009), 13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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